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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여] 한 여자


오래전에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고 놀랐던 기억이 선하다. 이런 글쓰기도 있구나, 충격적이기도 했고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얘기들에 혼란스럽기도 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의 글은 글쓰기의 힘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어머니의 삶을 마주하는 것.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테지만 단호하게 해내는 그를 보면서 그렇게 함으로써 겨우 아픔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의 의지와 함께 슬픔을 느꼈다. 아주 짧은 작품이지만 굽이굽이 생각이 고인다. 좀 더 다른 작품도 따라가고 싶어졌다.
아니 에르노는 노르망디의 소읍 이브토에서 카페 겸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부모 아래 자란 자신의 유년 시절로부터 시작하는 자전적 소재에 몰두하며 모든 픽션을 거부한다. 역사적 경험과 개인적 체험을 혼합한 그녀의 작품들은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이들의 삶을 철저하게 해부한다. 부모의 신분 상승( 남자의 자리 , 부끄러움 ), 자신의 결혼( 얼어붙은 여자 ), 성과 사랑( 단순한 열정 , 탐닉 ), 주변 환경( 밖으로부터의 일기 , 바깥세상 ), 낙태( 사건 ), 어머니의 치매와 죽음(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 한 여자 ), 심지어 자신의 유방암 투병( 사진의 사용 , 마르크 마리 공저)에 이르기까지 에르노는 자신의 삶을 거쳐 간 모든 것을 소재로 삼는다.

그녀는 판단, 은유, 소설적 비유가 배제된 중성적인 글쓰기를 주장하면서 표현된 사실들의 가치를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는 객관적인 문체를 구사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글들이 역사적 사실이나 문헌과 동일한 가치로 남아 있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에르노에게는 자아에 내재된 시적이고 문학적인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 슈퍼마켓이나 지하철과 같이 일상적인 대상들을 기억의 메커니즘, 시간의 감각 등 보다 고상한 대상들을 서술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결합함으로써 문학적, 사회적 위계를 전복한다.

남자의 자리 로 자신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덤덤하고도 가슴 뭉클하게 써내려간 아니 에르노가 이번에는 한 여자 로 어머니의 삶과 죽음을 되짚어 간다. 이 작품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10여 개월에 걸쳐 쓴, 자신의 어머니이자 한 시대를 살다 간 「한 여자」에 대한 기록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감정과 회한의 무게에 짓눌리는 법 없이 분석적이고 객관적이며 군더더기 없는 글을 쓰고자 한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에르노의 작품은 개인의 감정을 주관적으로 그리는 수사학적 장치가 없음에도 감동이 한없이 지평을 넓혀 가는 신비롭고도, 전혀 색다른 문학적 경험을 선사한다.